2010년경에 한 명문대 학생이 자퇴를 결정하고서 자신의 생각을 대자보를 통해 밝혔고 이 내용은 주요일간지에 기사화되었습니다. 그 대자보 내용이 당시 직장생활 10년차쯤 되었던 제 마음속에 큰 울림으로 와 닿았는데, 아직도 가끔씩 그 글을 떠올리며 내 자신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원문보러가기) 그 글에서 그녀는 자신을 길고 긴 트랙을 질주하는 경주마에 비유했습니다. <누군가를 따돌렸고 내가 꽤 우수한 성적으로 앞서고 있다고 생각할 때쯤 또다시 경쟁 질주는 시작된다>는 메타포는 바로 우리의- 아니 바로 제 자신의- 이야기였습니다. 자격증 장사 브로커로 전락한 대학교육, 그리고 초원에는 결코 닿을 수 없는 피 튀기는 무한경쟁의 트랙에 서있는 우리들. 

 

그녀의 글을 철부지 대학생의 투정쯤으로 치부하기엔 메시지가 담고 있는 바가 너무나 강렬했습니다. 직장생활을 10년쯤 해보니까 그딴 투정은 배부른 헛소리라고 코웃음 칠 수도 있었겠으나, 실상은 정 반대였습니다. 직장생활을 10년쯤 해보니까 정말 이 세계는 끝없는 트랙이자 거대한 기계였고, 저는 경주마인 동시에 사소한 부품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잠깐 추월하고서 푸르른 초원에 도달할 거라는 행복감에 도취되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습니다. 또 다른 경쟁이, 또 다른 살육이, 또 다른 전투가 다시금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언제쯤 초원을 달릴 수 있을까 꿈꾸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고, 그 치열한 취업시장에서 어찌 어찌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잘 살아 남았는데 이 경주는 끝나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달리던 수많은 이들이 조금씩 줄어들 때에 약간의 우월감을 느낀 것도 사실인데, 역설적으로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불안감도 커졌습니다. 

 

그렇게 일에 대한 불평도 늘어나고 짜증도 늘어나던 요즘, 문득 제 스스로의 커리어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과연 "경주"하는 내내 불행했을까요? 오히려 정 반대였습니다. 때로 눈물 쏙 빠지게 힘들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참 행복했고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왜냐면 제 인생의 목표가 "타인보다 빠르게 달리기" 나 "레이스에서 우승하기"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커리어우먼으로서 대단한 성공을 쟁취하진 못했어도 일할 곳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제 땀이 담긴 선물도 할 수 있었고, 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었고, 일터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쌓아갈 수 있었습니다. 힘든 순간들을 이겨냈다는 성취감도 느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법도 익혔지요.  

 

요즘도 저는 여전히 투덜거립니다. 지금 하는 일이 끔찍하게 싫을 때도 있고 회사에서 생긴 고민들을 머릿속에 그대로 담고서 집까지 돌아와 밤새 잠까지 설칠 때도 있습니다. 우울함의 늪에서 한참 헤매기도 하고 새로운 직업 세계를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미' 저는 초원을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론 자신이 하찮고 비굴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회피하지 않는 이유는 제게 더욱 소중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눈에 저는 지루하고 끝없는 트랙을 달리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제 이상과 가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제 마음은 이미 초원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노동의 신성함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비굴함 덕택에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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