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키우고 있는 홍페페 화분에서 갑자기 껑충하게 가지가 웃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쓸데없이 허공을 향해 비쭉 자라다니, 내 방 햇살이 부족해서 이러나 싶기도 하고 화분에 영양분이 부족해서 이럴까 싶은 마음에 과감하게 잘라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야메 조경사의 "수술"을 필요로 하는 다른 식물은 없나 싶어서 그 옆에 있는 화분들도 유심히 관찰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옆의 트리안 화분에도 웬 별모양 젤리같은 흰색 물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 두 가지 식물에 대해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것을 알게 되었죠. 홍페페의 저 높다랗게 자란 것은 가지가 아니라 바로 '꽃'이었고, 트리안에 매달린 저 흰색 별모양 젤리는 바로 트리안 '열매'라는 것을요. 하마터면 홍페페의 꽃을 웃자란 가지로 알고서 싹둑 잘라버릴 뻔 했고, 그 옆의 트리안 열매는 특이한 '물체'로 오해할 뻔 했지요.

우리 인생도 가끔 밋밋한 '꽃'을 피우거나 기묘한 모양의 '열매'를 맺게 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예쁜 구석이라고는 안 보이고 꼬불꼬불한 가지의 연장선 쯤으로 보이는 초록색의 개화... 그리고  긴 노력과 기다림 끝에 나온 결과물인데도, 타인의 눈에는 조금 우스운 별모양 열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해도 우리 자신은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노력했던 그 과정을,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그래서 지금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다해도 내 자신이 지금 꽃 피우고 있으며, 또 근사하게 열매 맺고 있다는 것을요. 남들 눈에 덜 화려해도, 좀 밋밋해도, 약간 우스꽝스러워도 상관 없어요.  스스로 신념을 잃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화무십일홍이라 여느 화려한 꽃들은 열흘을 넘기기 힘들던데, 홍페페의 초록색 꽃은 벌써 한달이 넘도록 생생한 모습을 뽐내고 있습니다. 너무 밋밋해서 보잘 것 없는 나의 오늘도 어쩌면 내 삶의 가장 찬란한 꽃이고 열매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S. 혹시 저 홍페페의 인생 모토는 이런게 아닐까요? "(여러모로) 가늘고 길게 가쟈~!"

흐음.....이누무 자슥........너..................뭘 쫌 아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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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개의 화분에 제때 물 주는 일은 참 어렵네요. 어떤 식물은 2~3일에 한번씩 물을 줘야 하고, 또 어떤 건 한달에 두번만 주어야 해요. 뭐 이리 복잡하고 어렵냐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니 이건 흡사 인간관계와 같습니다. 여섯 명의 친구를 사귄다면, 누군가에게는 흠뻑 관심을 부어 주어도 모라란 반면, 또 누군가에게 그랬다간 관계의 뿌리가 썩어 버리죠. 중용의 도를 지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너무너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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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마트를 가보면, 청과를 판매하는 곳엔 수박 시식 코너가 꼭 마련되어 있고 거기에 설치된 작은 스피커에서는 청개구리 소리가 흘러 나옵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향기! 수박 한 통을 구입해서 다 먹을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 시식용으로 잘라 둔 수박 한 조각을 덥썩 베어 물면 더위가 싹 달아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 나름의 알뜰한 여름나기 비법입니다. 한 조각이 너무 작아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한 쪽에 만족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어제 이마트 1층의 식품코너에서 수박 한 조각을 맛나게 먹고서 2층 고객센터 앞에 마련된 의자에 잠시 앉아서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할머니가 쑥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옆 쪽으로 걸어 오셨습니다. 할머니는 양손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수박 세 조각을 소중하게 쥐고 계셨습니다. 시식코너에 보면, 정말 양손 가득 과일을 쥐고 가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1층 시식코너부터 2층 고객센터 앞까지 그렇게 수박을 양손에 들고 오시다니, 살짝 불편한 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굳이 저렇게 하실 것까지 있을까...?

그런데 다음 순간, 할머니가 향하는 곳에서 어떤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웃음을 지으며 도착한 곳에는 휠체어에 앉은 뇌성마비의 30~40대의 아들로 보이는 남성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양손에 쥐고 오신 세 조각의 수박을 아들에게 먹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들은 민망한 듯, 처음엔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저었으나 연신 권하는 어머니의 몸짓에 못 이기듯이 수박을 한입 베어 드시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곳에선 아삭거리는 수박의 향기와 할머니의 아들이 수박을 먹는 소리, 그 모습에 행복해 하는 할머니의 미소가 합쳐져 작은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그 2층에서 펼쳐진 일을 보지 못하고 수박 시식코너에서 세 조각의 수박을 억척스럽게 들고 가는 할머니의 모습만 보았다면, 아마 눈살을 찌푸리고 그냥 지나쳤겠지요. 그런데 어제 그 이마트의 고객센터 앞에서 본 광경에 조금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인생이라는 기나긴 이야기를 모두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어떤 행동 중 일부분만 보며 욕했던 일들이 떠올랐거든요. 내 지갑을 몰래 가져 갔던 사람이 사실은 굶주린 가정을 짊어져야 했던 가장일지도 모릅니다. 지하철에서 내 발을 밟고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지나간 그 여자는 어쩌면 아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던 한 엄마일지도 모릅니다.

그 수많은 구구절절한 인생의 이야기를 담고서 사람들은 나름의 이유를 갖고서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떤 말을 전하고, 어떤 눈빛을 보내게 됩니다. 아기새를 위해 벌레를 물고 오는 어미새 같았던 그 할머니...휠체어에 있는 아들을 위해 수박을 쥐고 타인들의 따가운 눈빛을 받아가며,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 먼 곳까지 오셨던 그 분처럼 모든 이에게는 자신 만의 이유와 사연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연을 모두 알게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히 에티켓이니, 도덕이니 하는 말들을 도구로 삼아 타인을 욕할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되는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카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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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왜냐하면 인생이란 시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벤자민 프랭클린 -

새로운 곳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다이어리 속지를 바꿨습니다.

프랭클린 플래너의 첫장에 적혀있는 문구를 보고서 괜실히 혼자 뭉클해 졌습니다.

인생이란 시간 그 자체.....

매 순간을 결코 헛되이 쓰지 말자는 다짐을 다시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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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는 그들만의 잠언을 갖고 있다!  (2) 2013.04.12

저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가끔 TV에서 불교채널을 보면 좋은 말씀들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관점을 떠나 보편적인 관점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조언으로 받아 들이면 좋을 듯한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하루는 어떤 이가 하는 일마다 풀리지 않아 부처님을 찾아가 호소했다.

“부처님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으니 이 무슨 까닭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주지 도대체 무엇을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 아무 재물이 없더라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는 있는 것이다.

첫째,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밝은 미소를 띠고 부드럽고 정답게 대하는 것이다. 얼굴에 환하고 기쁨 가득찬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그 자체로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소중한 보시이다. 웃는 낯빛과 부드러운 얼굴은 최상의 존중이요 대화법이다. 얼굴빛이 좋으면 만사가 형통하기 마련이다.

둘째, 언사시(言辭施)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움 말 등은 상대방에게 힘을 주고 충만한 행복감을 전한다. 말씨 곧 말 씀씀이가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게 한다. 품(品)자는 입 구(口)자가 세 개이다. 결국 입에서 품격이 나온다는 뜻이다.

셋째, 심시(心施) 착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자비심으로 이웃들에게 베푸는 보시행으로 우리가 늘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도 소중한 보시이다. 마음가짐을 좋게 한다는 것은 마음을 늘 안정시켜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안시(眼施) 호의를 담아 부드럽고 편안한 눈빛으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부드럽고 안온한 눈빛 하나로도 충분한 보시가 된다. 예로부터 수양의 첫걸음은 눈빛을 바로 하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을 대할 때 좋은 눈빛을 나눌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교감은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시(身施) 몸으로 베푸는 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 준다거나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남의 일을 돕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공손하고 반갑게 인사하고, 어른을 만나면 머리 숙여 인사 할 줄 알고, 공손하고 예의 바른 몸가짐은 사람들에게 훈훈한 마음을 안겨 준다.

여섯째, 상좌시(床座施)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 주어 양보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것을 말한다. 지치고 힘든 이에게 편안한 자리를 내어 주는 것도 소중한 보시행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 큰 도량을 가지고 숙적 같은 동료일지라도 그가 앉을 자리를 내 주라는 것이다. 좋은 경쟁자가 결국 나를 키우기도 한다.

일곱째, 찰시(察施) 또는 방사시(房舍施)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속을 헤아려서 도와주는 찰시이다.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이미지 출처: http://sustainableman.org/sharing-is-bad-for-the-economy-good-for-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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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제 비밀 한 가지를 솔직하게 털어 놓겠습니다. 저는 이 블로그에 짧고 보잘 것 없는 글을 하나 올릴 때조차 그 안에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제 나름의 철학과 주장을 슬쩍 숨겨 놓습니다. 블로그의 짧은 메모, 하찮은 손뜨개질, 그리고 여행지에서의 흔들린 사진조차 그것만의 의미가 있을진데, 정성을 담아 만든 작품은 오죽하겠어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을 닥치는대로 아무 뜻없이 허투루 할 리가 만무합니다.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글을 쓸 때에 사람들은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당나라의 가도(賈島)라는 시인이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다(僧推月下門)’란 시구를 써 놓고 ‘밀 퇴(推)’ 를 쓸 지, ‘두드릴 고(敲)’를 쓸 지 고뇌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작가들은 퇴고(推敲)의 과정을 거치며 적고 지우기를 반복하곤 합니다. 주제의 결정부터 단어의 선택까지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관념의 일부분이 투영이 되고 그 생각의 조각들이 작품 속에 아로새겨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 속에 숨어 있는 복잡한 은유의 퍼즐을 하나 하나씩 뜯어서 맞춰보고 그 속의 숨은 그림들을 찾아보는 과정들은 참 재미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참 좋아하는데, 그 단순하고 유치한 줄거리 속에 숨겨진 뜻에 탄복하기도 하고, 감동해서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제가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더 눈에 잘 띄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슨 가족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린 적도 있으니, 애니메이션 채널 투니버스에서 인생의 진리를 찾는다고나 할까요. 헤헤..^^

이렇게 만화를 분석적으로 보는 탓인지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을 우연히 보며 기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정말 재미있고 굉장히 충격적인 스토리이긴 한데, 뭔가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죠.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어딘지 모르게 어그러진 느낌의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 애니메이션을 정말 열심히 봤습니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은 아직 완결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 작품을 잘 모르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줄거리의 일부를 말씀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을 포식하는 다수의 거대생물 '거인'의 침공에 의해 인류는 존망의 위기에 직면한다. 살아남은 인간들은 삼중으로 구축된 거대한 성벽안에서 사는 것으로 일시적인 안전을 얻게 된다. 성벽으로 인한 평화를 얻고 나서 약 100년 후, 부모님과 소꿉친구 미카사와 함께 살던 소년 엘런은 친구 아르민과 성벽밖으로 나가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돌연히 나타난 초대형거인에 의해 외벽이 부서지고 그 구멍을 통해 다수의 거인이 시가지에 침입, 그로 인해 눈앞에서 어머니를 잃은 엘런은 복수를 맹세한다. 벽의 붕괴로부터 2년 후 엘런, 미카사, 아르민 세 명은 제 104기 훈련병단에 입단하여 동기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한다. (출처: 위키백과)

높은 벽이 자신들을 보호해 준다고 생각하던 인간들의 안이한 평화는 결국 거인의 침공으로 인해 산산 조각나며, 인류는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스토리에 나오는 성벽과 거인의 메타포(metaphor)를 관객들은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양하게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떠올릴테고, 어떤 이들은 전쟁과도 같은 현대인의 삶을 떠올릴 테죠. 어떤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할테고, 또 다른 사람들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작품 속 상징의 의미는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진격의 거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역사 인식에 관한 관점에서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어쩌면 최근 하시모토의 위안부 관련 망언,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일본의 역사 왜곡과 독도 논쟁으로 뉴스에 연일 보도되는 내용들 때문에 이런 관점으로 만화를 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제 의구심은 아주 사소한 두 가지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왜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 속 주인공은 항상 작게 묘사되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 캐릭터 -가령 아톰과 왕눈이, 케로로- 들은 아주 작고 선하며 자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며 살아 갑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좌절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요. 2차대전이 패전으로 끝나고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했던 일본인들은 작고 불완전한 아톰의 칠전팔기 스토리를 보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왕눈이는 비록 가난하고 깡마른 아이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투투가 아무리 구박해도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 넘어져도 일어나 피리를 부는 초긍정 개구리입니다. 케로로는 지구 침략의 음모를 갖고 지구에 왔다고 공공연히 떠들지만, 이 귀요미 개구리 중사는 매일 개그혼을 불태우며 우주네 집안 청소를 담당합니다.

"진격의 거인" 속 주인공 역시 거인에 비해 너무나 작고 힘없는 존재이며, 그의 이웃과 가족은 그 도륙의 현장에서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끔찍하게 잡아 먹히고 맙니다. 결국 작다는 것은 연약함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동정의 대상이 되어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독특한 힘이 있습니다. 또한 그런 작은 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어 거대한 존재에게 저항을 시작할 때에 우리는 진심으로 그를 응원하게 됩니다. 철저하게 유린 당하던 작고 힘없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일본인들은 자신을 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일본은 작습니까? 일본은 진정한 피해자 입니까?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을 비롯한 독일, 이탈리아가 주축이 되어 벌인 세계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수천만에 이르는 인명 피해가 있었지요.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합리화했지만 실제로 일본이 한 일은 피점령국의 주요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스스로 시작했던 전쟁이었고 식민지와 점령지의 독립을 탄압한 가해자 신분에 다름 아니었지만, 1945년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해 2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으며 이때 오묘하고도 불합리한 심리적 치환이 발생합니다. 전쟁의 가해자가 일순간에 원폭의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히로시마 원폭은 수많은 민간인 피해를 낳은 참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라는 국가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당사자였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결국 일본은 패전 이후 세계대전에 대한 대외적 책임을 지고 육해공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이 자국의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경찰 예비대를 창설했고 그것이 현재는 자위대라는 명칭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1947년에 시행된 일본의 평화헌법에는 국가간의 교전권 포기와 어떠한 전력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평화헌법의 정신과 배치되는 형태로 1950년대 이후 계속해서 자위대의 전력을 확충하고 1990년대부터는 자위대의 해외파병과 집단자위권 행사 등의 명목으로 헌법을 바꾸면서까지 명실상부한 일본의 군대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방안을 검토해 왔습니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자위대 편)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역할만을 담당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자위대, 이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성벽의 역할과 묘하게 닮아 있지요. 성벽(자위대)은 보호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진격의 자유를 막는 감옥이기도 합니다. 10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평화가 유지되었기에 성벽(자위대)의 보호 기능에 대해서 자국민의 신뢰가 지나치게 강해졌으나 이 믿음은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경고입니다. 진정한 평화 유지를 위해선 자위대가 자국을 방어하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며, 적극적 공격권과 강력한 공격력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들 자신의 눈에 비춰진 "작은 일본", "피해자인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죠.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당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거인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용맹한 훈련병단에 자원입대하라고 속삭이는 것이지요. (참고로 일본의 자위대는 모병제로써, 징병제인 우리나라와 달리 18세 이상 27세 이하 일본 국적의 남성들이 자원입대해야만 병력 유지가 가능합니다)

사실 일본이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었다는 이유만으로 영구적으로 군대가 아닌 자위대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게 느껴질 법도 합니다. 일본과 함께 2차대전의 주축국이었던 독일도 현재 자국의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헌법 9조는 일본의 무력행사를 영구히 포기하고 전쟁할 권리인 교전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하고 있었으나, 최근 아베 내각이 출범하면서 이 헌법 9조를 개정하고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승격시키겠다는 공약을 내걸었고, 이에 주변국들은 술렁이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2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과 일본, 그 둘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것일까요?

독일과 일본이 자신들의 과거 침략역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일본이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승격시키겠다는 주장에 주변국들이 왜 그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두 국가는 전쟁 이후에 정반대의 다른 방향으로 달려 왔기 때문이지요. 독일은 과거에 자국이 일으킨 전쟁에 대해 끊임없이 사죄해 왔습니다. 일례로 독일의 2차 대전 패망 5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당시 독일연방공화국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과거 나치 독일이 저지른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만행을 조금도 미화함 없이 후세대에 전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이와 같이 독일은 전후에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인정했고, 학생들의 역사 교육까지도 이를 반영했지요. 가천대 명예 총장으로 계시는 이성낙 님께서는 신문에 기고하신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계십니다.

"1960년대 초 독일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독일 친구들이 나치 과거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을 느꼈다. 자기들의 ‘아픈 과거사’라 그러려니 했다. 몇 년이 지나 비슷한 계기에 독일 친구가 역시 같은 반응을 보여 조용하게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전후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나치 독일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전혀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필자는 6·25 동란사를 분명 고교시절 역사시간에 배웠기에 더욱 의아해했다.

수년 전 바로 그 친구에게 요즘도 독일학교에서 역사시간에 나치 독일에 대해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 아니 배우겠냐고 놀라워하기에, “오래전 네가 학교에서 나치 만행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고 한 것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는 “그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역사교육 담당 교사들은 필연적으로 나치 시대를 몸소 격하게 체험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치 관련 역사를 학생들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교육당국이 정책적으로 현대역사를 교육목록에서 아예 배제했다”고 설명했다.

실로 참신한 교육의 역동성이 아닐 수 없었다. 과거사에 대한 독일 국가와 국민들의 철저한 반성의지를 향한 공감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독일 국민의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심이 있었기에 화려한 수사에서 끝나지 않고 범국민적 반성이 따를 수 있었겠다는 사실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독일에서 나치 깃발을 들고 행진하면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며 아직까지도 독일 정부는 전범 관련자를 찾아내 재판에 회부하고 있지만,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이 욱일승천기를 들고 거리낌없이 거리를 활보하며 심지어 정치인이 앞장서서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런 일본이 틈만 나면 외적으로는 군비를 증강하면서 문화적으로는 이런 만화를 제작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니, 참 씁쓸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색안경을 끼고 보면 정치적인 색채가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가령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들 가운데 아이언맨이나 배트맨과 같은 영화들은 공화당의 이념을 담고 있으며, 공공연하게 미국 군수업체들의 투자를 받아 제작되는 헐리우드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자국을 더 멋지게 보이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자국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할 수 있는 만화를 만듭니다. 저는 그걸 욕할 마음도 없고 그런 작품들을 수입하지 말자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며 제가 상관할 바도 아닙니다. 더군다나 제 '숨은그림찾기'를 다른 분들께 강요할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우리 역사에 대한 뚜렷하고 올바른 역사관만은 부디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처럼, 무분별하게 타국의 문화와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관점을 계속 접하다보면, 조금씩 동화됩니다. 일본인들이 일본인의 관점에서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 나름의 "애국"이며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국인이 일본인의 역사의식과 관점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참 무서운 일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객관적 관점이란 절대 없으며, 숨겨진 뜻이 없는 작품은 단연코 없으니까요.

수용미학(受容美學)에 따르면, 텍스트는 독자와의 상호작용으로서 읽혀지는 과정에서 완성된다고 합니다. 즉,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인지되고 이해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므로 작품의 은유가 뜻하는 바 역시도 무엇이 정답이라고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겠지요. 따라서 "진격의 거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전적으로 여러분의 몫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여러분은 자신의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면 됩니다.

"진격의 거인"은 아직 완결도 나오지 않은 작품인데다 포스팅의 주제 자체가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사안이라 이 글을 적을까 말까 고민도 했지만, 그냥 올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야스쿠니 신사가 뭔지 아느냐고 하는 기자의 질문에 신사/숙녀 할때의 그 신사가 아니냐고 답하는 고등학생의 인터뷰를 보면서 제가 감정적으로 욱해진 탓도 있을 거에요. 부디 너른 마음으로 저의 치기 어린 포스팅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라요. 저는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방향을 갖자는 것도 결코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겠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

제게 있어 훌륭했던 조언은 바로 "코치를 두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처음엔 이 조언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CEO였고 꽤 경험도 많았거든요. 내게 코치가 왜 필요하다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건가 싶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만약에 내가 이쪽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면, 코치가 어떻게 내게 조언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제 요지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코치가 하는 일이 아니더군요.

코치는 당신만큼 플레이를 잘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당신이 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당신이 최선을 다할 수 있게끔 조력하는 것입니다. 코치는 타인의 눈으로 지켜본 다음 그것을 그 자신의 언어로 묘사하고,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지 논의하는 사람입니다. 

- 구글 CEO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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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sons My Son Is Crying (우리 아이가 우는 이유)

We wouldn’t let him eat candy from the floor. (바닥에 떨어진 캔디를 못 먹게 해서)
I wouldn’t let him eat mud. (진흙을 못 먹게 해서)
I wouldn’t let him drink bath water. (목욕물을 못 마시게 해서)
I took the boogers out of his nose. (코딱지를 파줘서)
He took his socks and shoes off. His feet are now cold. (지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발이 시려서)
I wouldn’t let him drown in this pond. (연못에 빠져 죽지 못하게 막아서)
We wouldn’t let him drink whiskey. (위스키를 마시지 못하게 해서)

"우리 아들이 우는 이유들"이라는 제목의 블로그에 보면, 블로그 쥔장의 아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펑펑 우는 사진들과 함께 당시에 아들이 왜 울고 있었는지 그 이유들이 적혀 있는데요. 그 이유들이 어찌나 황당하고도 귀여운지 몰라요 ^^ 아이를 키워본 부모님들은 아마 격하게 공감하시겠지요? 사실 아이가 우는 이유는 가지각색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어이없는 상황들이 대부분입니다. 땅에 떨어진 캔디를 못 먹게 했다고 울고, 목욕물을 못 마시게 해서 울고, 아이 스스로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발이 시리다고 울지요. 꼬마의 그 어이없고도 황당한 요구사항들을 보며 빙그레 웃다가 문득 제 어린 시절은 어땠을지 잠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진 속 울보 꼬맹이와 제 어린 시절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더라구요. 저도 굉장한 울보였거든요. 부모님이 내가 모르는 어떤 위험들을 막아줄 때마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흘겨봤겠죠? 무턱대고 울어대는 저를 보면서, 부모님은 얼마나 황당하고 답답했을까요? 당시에 아마도 눈 앞에 있는 먼지 뭍은 사탕과 먹음직스러운(?) 진흙, 그리고 거품이 둥둥 떠있는 향긋한 물 (.....읭?)을 못 먹게 말리는 부모님이 무척이나 미웠을 것입니다. 신발을 벗어 놓고서 발이 시려우니까 무작정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고, 연못 탐사의 창대한 꿈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참을 웃으며 이 사진들을 보다가... 부끄럽지만, 얼마 전에 어떤 일로 낙담해서 엉엉 울었던 제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신께서 그런 제 모습을 지켜 보시면서, 부모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앞으로 생길 수 있는 수많은 위험과 난관들을 막아 주시려고, 혹은 더 좋은 것들을 주시려고 정말 멀리까지 내다보고 열심히 도와주고 계시는데 저는 코 앞만 보고서 마구 울었던 건지도 몰라요. Q. 우앙!!!!!! 그 회사 연봉도 높던데 왜 이직하게끔 도와주지 않으셨어요? A. 사실은 그 회사의 네 매니저 될 사람은 됨됨이가 너무 나빠서 네가 오래 못 견딜테니까! Q. 저 이번 연휴에 해외여행 가고 싶었는데 그날 못가게 생겼어요. A. 사실은 그날 해외에 가면 큰 교통사고 날 거라서 막아주느라 그랬어! Q. 이번에 사기 당했어요 ㅠ.ㅠ A. 이번에 그렇게 배우지 않으면 더 나쁜 사람에게 더 크게 당할 거라서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의 실패나 좌절에 상심하지 마세요. 그 분은 당신께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준비하고 계실거에요. 하루에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백만, 수천만의 글들 가운데 바로 이 글을 당신이 지금 읽고 있다는 건, 울고 있던 당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그 분의 뜻일지 모릅니다.

P.S. 울보 자녀들을 무탈하게 키운 세상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사진출처: http://reasonsmysoniscrying.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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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하루는 아침 등교시간에 굉장히 붐비는 만원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거의 도착해서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문 앞으로 겨우 나왔지요. 그런데 워낙 북새통이라 제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 문이 닫혀 버렸고, 버스기사가 서둘러 차를 출발하려 하는 겁니다. 뜨악!!!!!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어서 내려야 하는데 말이죠! "Excusez-moi! Ouvrez la porte, s'il vous plaît. (실례해요!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라고 외치려고 하는데 제 소심한 "Excusez"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저의 절박한 표정과 내리려는 몸짓을 힐끗 본 어떤 남성이 정말 우뢰와 같이 큰 목소리로 "La porte!(라 포흐뜨)", 우리 말로 하면 "문"이라고 버스기사를 향해 외치는 겁니다. "실례합니다" 라든가 "~해주시겠어요?" 뭐 이런 말도 필요 없었고 그냥 문! 이라고 외친거죠. 그런데 버스기사가 정녕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고픈 건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출발하는데 이번엔 또 다른 여성이 다시 외쳤습니다. "La porte!!!!" 그들 덕분에 출발했던 버스는 결국엔 다시 세워졌고, 다행히도 저는 버스에서 내려 학교 수업시간에 잘 도착했습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프랑스에서 버스 문을 열어 달라고 할때는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La porte라고  외치면 된다는 것. ^^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절박한 소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열린 마음을 가진 다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버스를 내려야 했던 사람은 사실 저 하나밖에 없었으니 저 혼자만 희생하고 그냥 버스가 출발했다면, 다수의 승객들은 목적지에 아주 조금은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면하지 않았고 저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 주었으며, 아주 사소한 도움이었으나 저는 그들에게 진정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사실 그때껏 살면서 저는 아주 많은 순간에 소수이기보다는 다수였고, 비주류이기 보다는 주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절실히 부탁할 일도 별로 없었고, 도움을 필요로 한 적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보호 받았기에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지요. 소수는 대의를 위해 희생될 수 밖에 없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은연 중에 마음 속으로 그리 믿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다소 엉뚱한 상황에서 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소수자가 덜컥 되어 버렸습니다. 국적에서의 소수자, 인종에서의 소수자, 언어의 소수자, 게다가 버스에서 당장 내려야 하는 단 한 명의 버스하차 소수자... 그 후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중요한 사실에 조금씩 눈뜨게 되었지요. 흔히들 말하는 효율성이나 자유, 다수결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들 만큼이나 꼭 지켜져야 할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말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나무꾼이 나무들을 찾아와 부탁했습니다. "내 도끼에 맞는 나무 자루를 얻고 싶소." 나무꾼의 제안은 매우 조심스러웠지요. 그래서 몇몇 중요한 나무들이 신중하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물푸레나무를 제공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나무꾼은 그 물푸레나무 토막을 잘 다듬어 도끼 자루로 만든 다음, 본격적으로 나무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사방 팔방으로 마구 후려쳤고, 심지어는 숲의 가장 훌륭한 나무들까지도 마구 쓰러뜨려 버렸지요. 이에 떡갈나무가 히말라야 삼나무에게 말합니다. "최초의 양보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나무꾼의 제안을 거절해서 저 친한 동료를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오늘 우리는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버스 안에 올라타 있는 수많은 승객들 중 하나라서, 다른 한 명의 승객을 희생시키고 버스가 그냥 출발하더라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자신이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그 단 한 명의 절박한 승객이 될지도 모르고, 숲 속의 볼품없는 물푸레나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과연 "나"라는 한 사람의 권리를 위해 과연 목소리를 높여 버스문을 열라고 외치거나, 그 물푸레나무를 베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까요? 때로 일부의 희생이 당연한 것인양 말하고, 그들이 받는 피해는 그 희생자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된 결과일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를 향한 부당한 차별,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불합리한 폭력, 비주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불평등에 대해 오늘 내가 침묵하거나 또는 동조하다보면 훗날에는 우리 자신이 "다수"의 눈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 단죄의 대상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작은 목소리들을 위해 크게 외쳐 주세요. 차별받거나 희생되어야 할 대상자를 우리 인간들 중 그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기준으로요? 어떤 잣대로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judge)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7:1-2)"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고 그들의 희생에 침묵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심판과 차별,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마틴 니묄러 목사가 쓴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 교도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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