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4세기 로마의 군사 전략가 베게티우스는 자신의 저서 <군사학논고>에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라니 참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2015년에는 전세계와 우리나라에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습니다. 울컥하게 화가 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운 빠지기도 하는 사건 사고들의 연속이었는데, 결국 평화를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이들이 끝없는 증오와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아프네요.

저는 가톨릭신자인데, 미사가 끝날 즈음에 교우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며 "평화를 빕니다 (Peace be with you)"라고 말합니다. 습관처럼 그냥 주고받는 말이라서 그 뜻에 대해 굳이 되새김질하지는 않았는데, 요즘 들어 그 말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순간에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처음 건넨 인사말이 바로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평화란 무엇일까요?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6-9)"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굳이 즐겨보지 않더라도, 생태계의 질서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위의 성경 속의 표현이 세렝게티의 초원에서 실현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우리가 아는 모습은 바로 이거잖아요.

뜬금없이 세렝게티의 표범에게 초식을 강요하자는 말도 아니고, 야생의 세계에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적용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함께 사는 사회는 세렝게티가 아니고, 우리는 지성과 윤리를 가진 인간이잖아요. 승자독식 (Winner takes all)의 사회는 결국 우리 모두를 병들게 만듭니다. 곰이 풀을 뜯어 먹지 않는 한, 암소와 곰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강자가 자신이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한, 힘을 내세우면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성탄을 앞두고 있는 이때에 평화와 사랑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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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많은 일선 학교에서 대두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집단 따돌림의 원인과 해결방안들이 논의될 때면, 장년층 분들께서 꼭 말씀하시는 내용 중 하나가 '우리 어릴 때엔 그런 문제가 없었다'는 식의 반응입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이지메 현상을 겪어 왔지만 우리에게는 1990년대만 해도 이런 것들이 다소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고, 실제로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에는 왕따나 집단 따돌림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용어가 없었다고 해서 당시에 집단 따돌림의 문제 자체가 없었던 것일까요? 이젠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프랑스 파리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에 그곳에서 참 신기하다고 느꼈던 점 중에 하나는 도심이나 동네 거리, 어디에서나 장애인들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서울 도심에서는 장애인을 만나는 일이 굉장히 드문 일인데, 파리에서는 장애인들과 가끔씩 마주칠 수 있었고 심지어 저와 기숙사에서 한 방을 나눠 쓰던 룸메이트의 남자친구 역시 경미한 장애를 갖고 있었지요. 왜 파리에서 저는 많은 장애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혹시 국가별로 전체 인구 중 장애인 비율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일까요? 아마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와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장애인의 비율이 아니라 그들이 거리로 나올 수 있는 심리적 장벽의 높이 차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생뚱맞게 갑자기 장애인 이야기를 왜 꺼내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주류가 아닌 비주류나 소수자들에게 참 가혹한 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장애의 유무에 기인하는 장벽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불합리한 종류의 장벽들과 집단 따돌림이 조금은 다른 형태로 우리 문화 안에 참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더욱 공고해져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 이데올로기라는 높은 벽에 가로막혀 다문화 가정의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은 아직도 남몰래 눈물 흘리고 있으며, 정상인과 비정상인이라는 장벽에 막혀 장애인들은 현관 밖으로도 나오지 못해 집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예전에 집단 따돌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지만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해왔던 것이지요. 

게다가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체계는 옳음과 그름에 대해 단 하나의 잣대만으로 평가하여 획일화된 기준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학교 교육체계 속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워 왔을까요? 단 하나의 정답만을 추구하며 그 답에 자신을 비집어 넣고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 아이들은 한편으론 그런 세상을 원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조금 다른 소수의 아이들에게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집단 따돌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와 조금만 달라도 마치 그것은 ‘틀린 것’ 인양, ‘잘못된 것’인양 매도하고 배척하는 문화가 우리들 안에 참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이 집단 따돌림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고들 하지요. 다수의 아이들이 조금 다른 소수의 아이들을 따돌리는 모습은 소수자를 배척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장애인, 다문화 가정, 성적소수자, 독거노인에 이르기까지 힘없고 수적으로 열세에 속하는 이들에게 향하는 이유 없이 따가운 시선은 – 참 부끄럽긴 하지만 – 제가 어릴 때에도 있었고 제가 성인이 되어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집단 따돌림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봅니다.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청소년 집단 따돌림 문제들을 어떻게 단순히 청소년만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그 문제만을 분리하여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아이들에게만 변화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저는 그 해결을 위해 두 가지 측면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청소년부터 중 장년층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반성하고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모두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획일화된 교육체계, 소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존재의 욕구쯤은 희생하라는 식의 배금주의, 잘못된 방향의 강압적 집단주의,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내면부터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우리는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해 선진국들의 과학기술이나 경제시스템만 모방했을 뿐, 철학이나 이념, 사상과 같은 내적 성장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한국이 기적적인 경제적 성장은 이룩했을지언정 우리 안의 마음은 심하게 병들어 OECD 국가들 가운데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과과정, 각종 미디어의 컨텐츠 개발단계, 정부 정책 전반까지도 인간의 존재의 가치에 대한 성찰과 다양성 존중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입니다.

두 번째로 건전한 또래문화 형성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 개발들이 시급합니다. 집단 따돌림을 하지 말라는 캠페인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집단 따돌림] 이라는 문제상황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또래들이 건전하게 어울릴 수 있는 단체활동들을 개발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다양한 아이들이 모이는 것을 장려하고 예산을 지원하여 심적으로 소외 받는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 주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일선 학교에 심리상담을 전공한 상담교사들을 배치해 실질적인 상담기회를 학생들에게 준다면 지금보다 상황은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어쩌면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나기까지 기나긴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집단 따돌림을 막고 아이들의 마음을 돌보아 자살률을 낮추는 것은 출산율을 높이는 것만큼이나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첫걸음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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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sons My Son Is Crying (우리 아이가 우는 이유)

We wouldn’t let him eat candy from the floor. (바닥에 떨어진 캔디를 못 먹게 해서)
I wouldn’t let him eat mud. (진흙을 못 먹게 해서)
I wouldn’t let him drink bath water. (목욕물을 못 마시게 해서)
I took the boogers out of his nose. (코딱지를 파줘서)
He took his socks and shoes off. His feet are now cold. (지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발이 시려서)
I wouldn’t let him drown in this pond. (연못에 빠져 죽지 못하게 막아서)
We wouldn’t let him drink whiskey. (위스키를 마시지 못하게 해서)

"우리 아들이 우는 이유들"이라는 제목의 블로그에 보면, 블로그 쥔장의 아들이 눈물 콧물을 흘리며 펑펑 우는 사진들과 함께 당시에 아들이 왜 울고 있었는지 그 이유들이 적혀 있는데요. 그 이유들이 어찌나 황당하고도 귀여운지 몰라요 ^^ 아이를 키워본 부모님들은 아마 격하게 공감하시겠지요? 사실 아이가 우는 이유는 가지각색이지만, 가만히 보면 참 어이없는 상황들이 대부분입니다. 땅에 떨어진 캔디를 못 먹게 했다고 울고, 목욕물을 못 마시게 해서 울고, 아이 스스로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발이 시리다고 울지요. 꼬마의 그 어이없고도 황당한 요구사항들을 보며 빙그레 웃다가 문득 제 어린 시절은 어땠을지 잠시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진 속 울보 꼬맹이와 제 어린 시절이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더라구요. 저도 굉장한 울보였거든요. 부모님이 내가 모르는 어떤 위험들을 막아줄 때마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흘겨봤겠죠? 무턱대고 울어대는 저를 보면서, 부모님은 얼마나 황당하고 답답했을까요? 당시에 아마도 눈 앞에 있는 먼지 뭍은 사탕과 먹음직스러운(?) 진흙, 그리고 거품이 둥둥 떠있는 향긋한 물 (.....읭?)을 못 먹게 말리는 부모님이 무척이나 미웠을 것입니다. 신발을 벗어 놓고서 발이 시려우니까 무작정 눈물이 났을지도 모르고, 연못 탐사의 창대한 꿈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한참을 웃으며 이 사진들을 보다가... 부끄럽지만, 얼마 전에 어떤 일로 낙담해서 엉엉 울었던 제 자신을 떠올렸습니다. 신께서 그런 제 모습을 지켜 보시면서, 부모와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앞으로 생길 수 있는 수많은 위험과 난관들을 막아 주시려고, 혹은 더 좋은 것들을 주시려고 정말 멀리까지 내다보고 열심히 도와주고 계시는데 저는 코 앞만 보고서 마구 울었던 건지도 몰라요. Q. 우앙!!!!!! 그 회사 연봉도 높던데 왜 이직하게끔 도와주지 않으셨어요? A. 사실은 그 회사의 네 매니저 될 사람은 됨됨이가 너무 나빠서 네가 오래 못 견딜테니까! Q. 저 이번 연휴에 해외여행 가고 싶었는데 그날 못가게 생겼어요. A. 사실은 그날 해외에 가면 큰 교통사고 날 거라서 막아주느라 그랬어! Q. 이번에 사기 당했어요 ㅠ.ㅠ A. 이번에 그렇게 배우지 않으면 더 나쁜 사람에게 더 크게 당할 거라서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의 실패나 좌절에 상심하지 마세요. 그 분은 당신께 더 좋은 것을 주려고 준비하고 계실거에요. 하루에 인터넷에 올라오는 수백만, 수천만의 글들 가운데 바로 이 글을 당신이 지금 읽고 있다는 건, 울고 있던 당신을 위로하고자 하는 그 분의 뜻일지 모릅니다.

P.S. 울보 자녀들을 무탈하게 키운 세상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께 진심어린 경의를 표합니다!

사진출처: http://reasonsmysoniscrying.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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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하루는 아침 등교시간에 굉장히 붐비는 만원 버스를 탔습니다. 학교 앞 정거장에 거의 도착해서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문 앞으로 겨우 나왔지요. 그런데 워낙 북새통이라 제가 미처 내리기도 전에 버스 문이 닫혀 버렸고, 버스기사가 서둘러 차를 출발하려 하는 겁니다. 뜨악!!!!!

수업에 늦지 않으려면 어서 내려야 하는데 말이죠! "Excusez-moi! Ouvrez la porte, s'il vous plaît. (실례해요! 문 좀 열어 주시겠어요?)"라고 외치려고 하는데 제 소심한 "Excusez" 소리가 나오기가 무섭게, 저의 절박한 표정과 내리려는 몸짓을 힐끗 본 어떤 남성이 정말 우뢰와 같이 큰 목소리로 "La porte!(라 포흐뜨)", 우리 말로 하면 "문"이라고 버스기사를 향해 외치는 겁니다. "실례합니다" 라든가 "~해주시겠어요?" 뭐 이런 말도 필요 없었고 그냥 문! 이라고 외친거죠. 그런데 버스기사가 정녕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못 들은 척 하고픈 건지 그 소리를 무시하고 출발하는데 이번엔 또 다른 여성이 다시 외쳤습니다. "La porte!!!!" 그들 덕분에 출발했던 버스는 결국엔 다시 세워졌고, 다행히도 저는 버스에서 내려 학교 수업시간에 잘 도착했습니다.

이때 정말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웠는데, 하나는 프랑스에서 버스 문을 열어 달라고 할때는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그냥 La porte라고  외치면 된다는 것. ^^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절박한 소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열린 마음을 가진 다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버스를 내려야 했던 사람은 사실 저 하나밖에 없었으니 저 혼자만 희생하고 그냥 버스가 출발했다면, 다수의 승객들은 목적지에 아주 조금은 일찍 도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외면하지 않았고 저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 주었으며, 아주 사소한 도움이었으나 저는 그들에게 진정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사실 그때껏 살면서 저는 아주 많은 순간에 소수이기보다는 다수였고, 비주류이기 보다는 주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절실히 부탁할 일도 별로 없었고, 도움을 필요로 한 적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보호 받았기에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도 없었지요. 소수는 대의를 위해 희생될 수 밖에 없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은연 중에 마음 속으로 그리 믿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머나먼 타국의 다소 엉뚱한 상황에서 저는 여러가지 의미에서의 소수자가 덜컥 되어 버렸습니다. 국적에서의 소수자, 인종에서의 소수자, 언어의 소수자, 게다가 버스에서 당장 내려야 하는 단 한 명의 버스하차 소수자... 그 후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중요한 사실에 조금씩 눈뜨게 되었지요. 흔히들 말하는 효율성이나 자유, 다수결이 전부가 아니며, 그것들 만큼이나 꼭 지켜져야 할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말입니다. 이솝 우화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는 나무꾼이 나무들을 찾아와 부탁했습니다. "내 도끼에 맞는 나무 자루를 얻고 싶소." 나무꾼의 제안은 매우 조심스러웠지요. 그래서 몇몇 중요한 나무들이 신중하게 논의를 거듭한 끝에, 가장 볼품없고 초라한 물푸레나무를 제공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나무꾼은 그 물푸레나무 토막을 잘 다듬어 도끼 자루로 만든 다음, 본격적으로 나무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사방 팔방으로 마구 후려쳤고, 심지어는 숲의 가장 훌륭한 나무들까지도 마구 쓰러뜨려 버렸지요. 이에 떡갈나무가 히말라야 삼나무에게 말합니다. "최초의 양보로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나무꾼의 제안을 거절해서 저 친한 동료를 희생시키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 꼴이 되지는 않았을텐데..." 

오늘 우리는 한국 사회라는 이름의 버스 안에 올라타 있는 수많은 승객들 중 하나라서, 다른 한 명의 승객을 희생시키고 버스가 그냥 출발하더라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우리 자신이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그 단 한 명의 절박한 승객이 될지도 모르고, 숲 속의 볼품없는 물푸레나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이 과연 "나"라는 한 사람의 권리를 위해 과연 목소리를 높여 버스문을 열라고 외치거나, 그 물푸레나무를 베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할까요? 때로 일부의 희생이 당연한 것인양 말하고, 그들이 받는 피해는 그 희생자 자신의 잘못에서 기인된 결과일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를 향한 부당한 차별,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불합리한 폭력, 비주류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불평등에 대해 오늘 내가 침묵하거나 또는 동조하다보면 훗날에는 우리 자신이 "다수"의 눈에 불편한 존재가 되어 단죄의 대상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작은 목소리들을 위해 크게 외쳐 주세요. 차별받거나 희생되어야 할 대상자를 우리 인간들 중 그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을까요? 어떤 기준으로요? 어떤 잣대로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judge)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7:1-2)"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고 그들의 희생에 침묵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심판과 차별,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마틴 니묄러 목사가 쓴 시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 교도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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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which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Living one day at a time,

Enjoying one moment at a time,

Accepting hardship as a pathway to peace,

Taking, as Jesus did,

This sinful world as it is,

Not as I would have it,

Trusting that You will make all things right,

If I surrender to Your will,

So that I may be reasonably happy in this life,

And supremely happy with You forever in the next.

Amen.

- written by by Reinhold Niebu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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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컴패션을 통해 제가 결연하여 후원하고 있는 아이의 이름은 라스미 입니다. 라스미는 수학을 잘 못하지만, 글쓰기는 좋아합니다. 그 아이는 가끔씩 제게 편지를 쓰곤 하는데, 인도어로 적힌 편지를 현지 봉사자가 영어로 번역하여 보내 줍니다. 반대로 제가 영어로 쓴 편지는 인도어로 번역되어 그녀에게 전달 되지요. 이렇게 오고 가는 편지를 통해서 그 아이의 형제 중 하나가 청력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라스미의 꿈이 선생님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 아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늘 그렇듯 연필로 꼭꼭 눌러 적은 그 아이의 삐뚤빼뚤한 글 아래 번역된 내용이 영어로 적혀 있습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Dear auntie"로 시작한 그 아이의 편지엔 라스미의 어머니께서 아프시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고, 라스미 어머니께서 고열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는 슬픈 소식이 적혀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 아이인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실 정도면 많이 편찮으신 게 아닐지 걱정입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나는데, 제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 더욱 마음이 아프기만 합니다.

그 아이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희 엄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라고....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막막한 제 마음을 읽기라도 했듯이 말이죠. 편지를 잘 접어 놓고서 라스미의 어머니가 완쾌하시길 기도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모두 기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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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손이 나에게 내리셨다. 그분께서 주님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나가시어, 넓은 계곡 한가운데에 내려놓으셨다. 그곳은 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분께서는 나를 그 뼈들 사이로 두루 돌아다니게 하셨다. 그 넓은 계곡 바닥에는 뼈가 대단히 많았는데, 그것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 내가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 뼈들에게 예언하여라.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 마른 뼈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주 하느님이 뼈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너희에게 숨을 불어넣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겠다.  너희에게 힘줄을 놓고 살이 오르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씌운 다음, 너희에게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게 하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분부받은 대로 예언하였다. 그런데 내가 예언할 때, 무슨 소리가 나고 진동이 일더니, 뼈들이, 뼈와 뼈가 서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으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라오며 그 위로 살갗이 덮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숨은 아직 없었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숨에게 예언하여라. 사람의 아들아, 예언하여라. 숨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 숨아, 사방에서 와 이 학살된 이들 위로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분께서 분부하신 대로 내가 예언하니, 숨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살아나서 제 발로 일어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  (에제키엘서 제37장 1-10절)

성경 속에서 마른 뼈들이 되살아나는 장면은 강한 충격을 줍니다. 방금 죽은 사람도 아니고, 이미 말라버린 뼈들이 되살아나 엄청나게 큰 군대가 되다니요. 어지간한 판타지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모골이 송연해지는 장면이 성경 속에 생생히 펼쳐집니다.

이미 희망은 사라졌고, 더 이상은 기대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좌절하고 있던 때에 전 우연히 이 성경 구절을 접했습니다. 정말 놀랐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제게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말씀과 같았으니까요. 공포와 좌절 그리고 실의에 빠져 마른 뼈들로 가득한 계곡을 걷고 있는 제 자신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제게 묻습니다. "얘야...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니?" 그때 제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맙소사. 주님. 제게 왜 이러시는 거에요? 이미 다 죽다 못해 뼈까지 말라버렸잖아요! 저는요. 정말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왜...왜 제게 이러시는거에요!?" 사실 그분께 화가 났다거나 이렇게까지 저를 몰아가는 상황에 분이 났다기 보다는, 유능하지 못한 자신에게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 제게 주님은 그 마른 뼈들이 거대한 군대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이 말씀을 접하고서 불가능도 가능케 하시는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도 물론 생각했지만, 그보다 그동안의 제 태도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몇가지 좌절을 겪으며, 스스로의 무능함에 자책하고 굉장히 분개했습니다. 아직까지 실패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터라, 어설픈 자만심 때문에 최근의 좌절이 더 아프고 힘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배웠고 늘 그렇게 믿어 왔는데, 현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자신이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무능력 탓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노력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지던가요? 모든 일의 성공엔 우리의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긴 하지만, 노력을 아무리 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성과주의는 우리 사회의 우울증과 자살율 급증의 원흉일지도 모릅니다. 옛날에 unfortunate person은 그저 불운한 사람을 지칭했었으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부(fortune)가 없는 상태 -unfortunate-는 단순히 운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태만함이나 노력 부족에 의한 결과인 양 몰아 갑니다. 결국 모든 성공과 모든 실패의 책임이 이젠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 되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성과주의는 그런 면에서 참 끔찍하게 어울리는 환장(!)의 짝꿍입니다.

사소한 성공에 도취되어 있을 때엔 몰랐는데, 최근에 좌절과 실패들을 경험해보니 그간의 제 오만함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이루었던 일들은 온전히 제가 잘나서 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음을, 제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즘 겪었던 실패들도 그분의 뜻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크고 작은 기적들부터 손바닥을 뒤집는 정도의 사소한 행동에도 "제 믿음과 노력" 뿐만 아니라 "주님의 뜻하심"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제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나 봅니다. 제 안의 강퍅한 마음을 바로잡는 길은 무수한 실패밖에 없다는 걸 그분께선 이미 알고 계셨을 테지요.

제 고집을 내려 놓고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집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글을 쓰는 며칠동안 기적과 같이 그동안 쌓여있던 문제들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바라고 기대하던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제게 가장 필요하고도 가장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제가 예상했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전혀 다른 "그분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마른 뼈가 다시 살아나 그 안에 숨결이 깃드는 것과 같은 놀라운 기적이 지금 우리의 일상 가운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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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볼에 꽃분홍색 블러셔로 한껏 단장한 원색적인 옷차림의 일본 가수가 몇 해 전에 혜성과 같이 등장했습니다. 그는 어설프기 그지없는 한국어로 이렇게 노래하지요.

"(여보쎄요? 어. 웨닐이야... 이 느준 시간에...하.하.하. 그래꾸나. 무서운 꿈울 꾸어꾸나~) 갠차나요 갠차나요~ 갠차나요~♪"

그의 초/난/감/한 노래말 속 "무서운 꿈"에는 어쩌면 볼터치한 초난강이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쿨럭! 여하튼 오늘의 포스팅 소재는 *무서운 꿈* 되겠습니다. 뜬금없이 웬 꿈 이야기냐고 하실런지 모르겠으나, 이 무서운 꿈 이야기는 다소 황당하긴 하지만 조금은 재미있기도 하여 글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꿈 이야기에 앞서서... 우리는 수많은 결정의 순간을 거치곤 합니다. 평행우주이론을 적용한다면, 그 선택의 순간마다 무한대에 가까운 여러 갈래의 우주들이 존재하게 되겠죠. 사소한 결정이 우리의 인생을 정말 판이하게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는 맥락에서 보자면, 또 다른 우주 속의 내 인생은 전혀 딴판일지 모릅니다.

여튼 뜬구름 잡는 공상과학 같은 소리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힘들고 어려운 선택의 순간마다 저는 고민을 참 많이 하는 편입니다. 여기 저기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혼자 끙끙거리며 짱구를 굴리기도 하고, 현명한 판단을 하게끔 지혜를 달라고 신께 간구하기도 하지요. 이 선택이 내 인생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지 모른다고 생각하다보니 결정이 참 힘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답답하리만치 답이 안나오는 선택의 순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이직을 지금 해야할까? 원자재 펀드를 살까 말까? 그 자격증이 내게 필요한걸까?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볼까? 기타등등! 아마도 창조주께서 내게 주시려는 힌트가 세상 곳곳에 숨어 있을텐데 그 암호들을 풀지 못해 이렇게 오락가락하면서 지낸다고 투덜대죠.

이런 고민이 깊어지고 있었던 어느 날 밤에 어떤 고민으로 한참을 뒤척이다가 저는 꿈을 꾸게 됩니다. 꿈 속에 주님이 나타나 말씀하셨어요. "세상에 펼쳐져 있는 모든 만물의 진정한 의미와 그 곳에 숨겨져 있는 뜻을 알게 해주겠노라!" 꿈 속에서 정말 뛸 듯이 저는 기뻐했습니다. 내가 그 수많은 지혜에 눈을 뜨게 되고 모든 사물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더 이상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할 필요는 없을테니까요!!! 그리고 주님은 홀연히 사라지셨습니다.  그 분이 사라지고서 어디선가 한줄기의 바람이 불어오고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이 신비롭고 환상적인 꿈이 악몽이 되어 버립니다. 바람의 의미와 햇살의 목적, 바람소리의 이유들, 이 모든 것들에 담겨있는 엄청난 의미와 정보 때문에 저는 머리가 깨질 듯 괴로워져 정신을 잃고 맙니다. 너무나 압도적이었으며,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양과 속도였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386 컴퓨터로 World of Warcraft를 플레이하려 하는 정도의 압박이랄까요...-_-

그리고 그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창조주의 모든 암호를 한꺼번에 풀 수 있는 Decoder를 가진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 꿈을 통해 깨닫게 된거죠. 현실에서 전 어리석은 선택들을 하고 때론 뱅뱅 돌아 한 자리를 맴돌고 있지만, 그게 꼭 틀린 선택이라거나 불행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에 눈뜨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뭐 좀 느리면 어때요. 비범함을 꿈꾼다는 것은 제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겠지만, 좀 미련하더라도 달팽이 걸음걸이로 행복하게 살면 되는거죠!

첫번째 결론: 초난강 아저씨는 이 모든 걸 수년 전에 다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이 무시무시한 꿈이며, 결국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그는 노래 가사를 통해 이미 예언(?!!)했어요.

두번째 결론: So I'm moving at a snail's p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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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런 경험해 본 적 있으세요? 정말 짧은 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진 적 말이죠.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 길을 가로질러 급하게 뛰어가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차에 부딪칠 뻔한 적이 있었는데요. 1초도 안되던 그 순간에 영원을 느꼈었답니다. 영화에서처럼 슬로우모션으로 차가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봤고, 어릴적부터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속에 흘러가더란 말이죠. 처음으로 자전거를 배웠던 일, 가족들의 모습, 혹시 이게 마지막일까 라는 생각, 그럼 나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라는 걱정...어쩜 그렇게 많은 생각이 일순간에 흘러갔을까요? 죽음 직전에 맞이한 "영원같은 순간"을 그 이후로도 몇번 경험했었는데요. 사랑의 행복한 순간이나 극도의 긴장에 떨고 있었던 때에도 일순간이 영원과 같이 느껴졌답니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를 경험했던 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나봐요. 광야에서 놀라운 광경, 주님의 천사가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되거든요. 왜 떨기나무가 불타는데도 재가 되지 않고 계속 불탔을까요? 혹시 그 순간이 너무나 강렬해서 굉장히 길게 느껴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모세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말씀하시죠.  "나는 있는 나다."

시간의 흐름이 참 기묘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지요. 참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짧았던 때도 있구요. 또 엊그제 같았던 일들이 사실은 굉장히 오래전 일인 때에도 있어요. 사람의 마음도, 처해있는 상황도, 갖고 있던 기회들도 시시각각 변하고, 제 자신 역시도 그렇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말씀하세요. "나는 있는 나다." 그분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현존하고 계시다는 의미겠지요.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건 인간인 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는데, 다시 되돌아보니 그렇게 지내지 못할때가 많아요. 

어제를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거든요. 아직도 저는 참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후회도 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있는 나"가 아니라 "있었던 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영원과 같았던 순간들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는데 말이죠.

온전하게 오늘을 살자고 결심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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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생 처음으로 [피정]에 가본 것은 올해 초여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복잡하고 조금은 불편한 사정이 있긴 했지만, 우연치 않게 알게 된 기회였기에 제멋대로 "이건 분명 하느님의 부르심이야"라고 단정하고서 가게 된 것이었지요. 대학원 수업에 직장생활까지 병행하는 터라 피정을 위한 시간을 낸다는 것도 굉장한 도전이었고, 게다가 워낙 불편한 자리를 못 참는 성격인데 그런 복잡한 상황을 참는다는 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가기로 결심!

 이틀간의 침묵피정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온전히 피정의 기쁨을 즐기지 못했답니다. 이상하게 별 것 아닌 일들이 머릿속에 못 박혀서 "하느님과 저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거에요. 그러다보니 애초에 피정을 가겠다고 나선 내 자신이 미웠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나를 집어삼켰고, 그런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다시 미워졌고, 눈물만 자꾸 걷잡을 수 없게 흐르고 또 흐르고...

 영화에서 보면 가녀린 여주인공들이 흘리는 눈물은 구슬처럼 또르륵 흐르던데, 저는 항상 눈물과 함께 엄청난 콧물이 주책없이 함께 나오거든요. 눈물보다 코 풀기에 정신없어 훌쩍거리며 울다보면,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으잉! 난 여주인공 팔자는 아닌가봐 ㅠ,ㅠ) 눈물콧물 범벅이 된 채로 이틀을 보내자, "아니, 하느님! 왜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거예욧!!??"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더라구요. 

 그렇게 이틀을 끝마치게 될 때 즈음, 고해성사의 시간이 있다고 누군가 말하는데 하느님께 단단히 삐진 저는 고해성사고 뭐고 집어치우고 집으로 빨리 돌아가고픈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렇게 고해성사의 시간이 거의 끝나 가는데,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픈 겁니다! 방출 욕구를 해결하고 오는 길에서 고해성사를 하라는 진짜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고해성사가 시작되자마자, 신부님 앞에서 다시 엉엉 울어버렸답니다. 이번에도 눈물은 줄줄, 콧물은 펑펑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부끄러운 감정이 들지 않더군요. "신부님...흑흑..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왜 저는 그게 안 될까요. 그게 안되는 제 자신이 너무 밉고 한심하고..엉엉...훌쩍훌쩍"

 한참을 듣고 계시던 신부님이 정말 따뜻하게 해주신 말씀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아닌 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요. 사제인 저 역시도 그렇거든요. 하지만 스스로 부족하다고 해서 자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지금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시는 분이니까요."

 아...! 결국 문제는 제 오만함이었어요. 사람들 앞에서 교양 있는 척, 쿨한 척, 모든 것을 이해하는 척 행동할 수는 있어도, 한 분만은 속일 수 없었던 거죠. 주님은 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분은 나의 부족함까지 사랑해주신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저를 이틀동안 질질 짜고 있게 만드셨나봐요.

 아직도 가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조금은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지만... 주님이 도와주셨고, 함께해준 요세피나 덕택에 성장통을 잘 이겨냈답니다. 아픈만큼 성숙한다는 뻔하디 뻔한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저는 전보다 조금은 자라났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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