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씨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참 즐겁고 무얼 먹든 맛있고, 무얼 마셔도 기분 좋게 취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업무상 알게된 지인분과 회사 분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가끔 있는데 신기하게 그 멤버들이 모이면 항상 즐겁고 마음이 느긋해집니다.

얼마 전에 상명대 앞의 그랑크뤼 라는 와인바에 그분들과 함께 다녀왔는데요. 그때 마셨던 와인 중에 하나가 꽤나 인상 깊더라구요. 그래서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와인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아마 아실거에요. 돈나푸가타, 앙겔리(Donnafugata, Angheli) 입니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에서 생산되는 레드 와인이구요. 포도 품종은 멀롯 50%, 네로 다볼라 50%로 제조됩니다. 돈나푸가타란 이름은 ‘도망간 여자’란 뜻입니다. 19세기 나폴리에서 시칠리아 섬으로 이주한 왕녀 마리아 카롤리나의 이야기지요.

와인의 첫 느낌은 약간 드라이한 맛에 강하고 복잡한 향이 코끝에 맴돌아요. 맛은 상당히 단순한데 반해 그에 걸맞지 않게 향기는 현란하여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들어요. 잠시 수다를 떨다가 다시 마셨는데, 이번엔 또 다른 향, 또 다른 맛으로 느껴집니다. 조금은 누그러들었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부드러워졌다고 할까요...그 짧은 시간에 맛과 향이 전혀 다른 와인이 된거에요!! 그리고 또다시 잠시의 수다가 오간 후에 마셨는데, 이제는 향이 모두 도망갔음을 발견합니다. 어쩜 하나의 와인의 그토록 다양한 맛과 향을 전해줄까요? 그리고 그 이름과 맛이 어쩌면 그리도 잘 어울릴까요?

이 와인은 전혀 훌륭한 와인이 아니려니와, 추천할만한 와인도 아닙니다. 맛도 그냥 단조롭고 향도 너무나 빨리 날아가는 단점이 있거든요. 그러나 매력있는 와인임에는 분명합니다. 한때의 사랑으로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화르르 빨갛게 제 몸을 태우다가, 일순간에 사그라드는 한 여인의 흔들리는 마음. 그 모습을 와인을 통해 몰래 훔쳐 본 것만 같아서 정말 닭살이 돋도록 놀랐답니다. 언젠가 내가 바람(!)이 나면 한번쯤 상대방과 함께 이 와인을 마셔봐야 겠다는 그런 엉뚱한 상상을 했답니다. 강렬하지만 빠르게 사라지는 이 와인의 향기 만큼이나, 그 찰나의 폭풍과 같은 감정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일깨우기 위하여.